수년간 리그 오브 레전드 이스포츠는 매우 확고한 구도 아래 존재했다. 간혹 작은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아무리 헛된 저항을 이어간들 결국 이야기의 끝에서는
한국 팀들이 본래 자신들의 자리였던 왕좌를 되찾아가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달라졌다. 거인들이 휘청이기 시작했고, 희망이 피어났다. 그때까지 철권통치가 이어지던 가장 척박한 전장 한가운데서, 지배층에 맞서 수년간 저항의 중심에 섰던 한 미드라이너의 모습으로 새로운 꿈들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는 라스무스 뷘터. 그러나 세상은 곧 ‘캡스‘로 기억하게 될 이름이었다.
말썽꾸러기 소년
겨우 15세의 나이에 첫 토너먼트를 치른 '캡스' 라스무스 뷘터는 이스포츠 무대에서 눈부신 성장세를 보였다. 유럽 프로 1세대는 아니었으나, 현재까지 그는 LEC가 존속한 기간의 약 70%를 그 무대 위에서 보냈다. 2세대에 속하는 그는 유럽에 지역 리그 체계가 제대로 출범하기 전, 초창기 2부 리그 격 대회들을 거치며 성장했다. 팬들이 그의 초기 활동으로 실질적으로 기억하는 첫 팀은 스플릿 중반에 합류했던
네르브(Nerv)에서의 짧은 시절일 것이며, 당시 팀은 최하위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당시 겨우 16세였던 '캡스' 라스무스 뷘터는 그 나이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솔로 랭크에서의 행동 때문에 꽤나 악명이 높았다. 같은 해 그는 다크 패시지 소속으로 TCL 우승을 차지했으나,
출전 가능 연령 미달로 2016 월드 챔피언십 예선전을 위한 브라질 원정에는 동행하지 못했다. 비록 아직 그의 때가 오지 않았을지라도, 곧 주목을 받게 될 상황이었다. 1년 뒤 겨우 17세가 된 그는
소속으로
EU LCS 무대에 데뷔할 순간을 맞이했다.
초기에는 그의 태도로 인해 의구심을 품는 시선이 많았고, 당시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수상 이력을 자랑하던 팀의 미드라이너 자리에 그가 과연 걸맞은 활약을 보여줄 수 있을지 많은 이들이 반신반의했다. 이전에는 월드 챔피언
'슈셰이' 마치에이 라투슈니아크가 있었고, 4년간 자리를 지킨
'엑스페케' 엔리케 세데뇨 마르티네스가 있었으며, 팬들의 사랑을 받은
이 있었다. 당시 이 젊은 덴마크 선수는 증명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지만, 자신의 실력을 입증할 경험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나틱은 초반의 어려움을 딛고 점차 경기력을 끌어올렸으며, 캡스의 활약 속에 지난 한 해의 부진을 털어내고 유럽 정상권으로 도약했다. 유럽 3시드로
2017 월드 챔피언십 진출권을 확보하면서 그는 1년 전 좌절되었던 꿈의 무대를 마침내 밟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 치러진 대회에서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와 팀은 연속된 두 번의 순위 결정전에서 승리하며 끈질기게 그룹 스테이지를 통과했다. 이로써 17세 소년은 첫 출전 대회에서 모든 예상을 깨고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해 8강에서 유럽의 모든 희망이 다시 한번 꺾이고 결국 두 한국 팀이 결승전을 치렀지만,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환점
무언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수년간 사실상 적수가 없었음에도, 그렇게 느껴졌던 한국 팀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 분명, 이전의 수많은 착각처럼 이 역시 금세 사라질 한낱 망상에 불과할 터였다. 진실을 확인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새롭게 개편된 로스터와 함께 프나틱은 약 3년 만에 처음으로 EU LCS를 휩쓸며 다시 한번 왕좌를 되찾았다. 이어
2018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이 다가왔다. 아직 팀의 가장 찬란한 시기는 아니었으나, 서포터
의 합류와 탑 라이너를 번갈아 맡는 식스맨
의 기용으로 독특한 시너지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프나틱은 4강에서 패배했음에도 그룹 스테이지에서 한국 대표 팀을 상대로 한 세트를 따냈고, 대회는 결국 중국이 세계 정상에 오르며 기어코 한국의 왕조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럽으로 돌아온 팀은 물러서지 않았다.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캡스는 다시 한번 홈그라운드를 정복했고, 마침내 그의 두 번째 월드 챔피언십 도전이 찾아왔다. 이미 한 차례 8강에 오른 바 있던 그에게는 이제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순간이 다가왔다.
먼저 프나틱은 그룹 스테이지에서
을 두 차례 꺾으며 전승에 가까운 성적으로 조 1위를 차지했다. 이어 8강 토너먼트가 시작되자,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프나틱은
을 3-1로 제압했다. 북미의
은 아프리카 프릭스를 완파했다. 프나틱에게 두 번이나 패배했던 인빅터스 게이밍이 LCK 챔피언
를 꺾었다. 그리고 G2 이스포츠는 풀세트 접전 끝에 MSI 챔피언
을 잡아내는 이변을 연출했다.
서양 세 팀이 4강에 올랐고, 중국 팀으로는 인빅터스 게이밍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리고 2012년 이후 처음으로 한국은 월드 챔피언십 우승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기세를 몰아 프나틱은 클라우드 나인을 3-0으로 완파했고, 결승에서 인빅터스 게이밍과 D조 리매치를 치르게 되면서 한국 인천에서 자웅을 겨룰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가슴 아픈 결말 속에, 유럽 팬들의 모든 희망과 꿈은 차올랐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휩쓸려 사라졌다. 중국은 직전 MSI 우승에 이어 국제 리그 오브 레전드 이스포츠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은 실망과 분노, 그러나 그 이면에 끓어오르는 결의를 품은 채 초심으로 돌아가 새 판을 짜야 했다.
왕조 건설
한때 의구심을 받던 선수였던 '캡스' 라스무스 뷘터는 2019년 라이벌 팀인 G2 이스포츠로 이적하면서 순식간에 프나틱에게는 뼈아픈 빈자리가 되었다. 결승에 진출했던 프나틱의 그림자에 가려지긴 했으나 G2 역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바 있었고, 유럽의 유리천장을 깨뜨리기 위해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루카 페르코비치가 봇 라인으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구성된 이 팀은 서류상 유럽 역사상 가장 강력한 로스터로 보였으며, 그 혈통은 머지않아 결실을 맺게 될 터였다.
스프링 스플릿을 완전히 압도한 재편성된 팀은 곧바로 2019 MSI 진출을 확정 지었고, 전년도 서구권 팀들의 월드 챔피언십 성과에 힘입어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G2는 한국의 대표적인 강호
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남은 그룹 스테이지 일정은 다소 불안정했고, 결국 5승 5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 뒤에 펼쳐질 일들을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예상을 뒤엎고 북미 대표
가 무패에 가깝던 인빅터스 게이밍을 꺾으며 결승에 진출했고, 바로 다음 날 G2의 차례가 찾아왔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5세트 접전 끝에 G2는 SKT를 다시 한번 제압하며 팀 리퀴드와의 결승을 준비했다. 결승전에서 그들은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당시 국제 대회 다전제 최단 시간 기록을 세우고 북미 팀을 완파해
유럽 역사상 최초의 MSI 우승 트로피를 차지했다. 이는 중국과 한국이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전이었던 프나틱의 시즌 1 월드 챔피언십 우승 이래 기존의 국제 질서에 실질적인 균열을 낸 첫 사례였다.
분위기는 열광 그 자체였다. 그들 이전에는 누구도 해내지 못한 성과였다. 2016 MSI의 CLG나 2017 MSI의 G2처럼 국제 대회 결승에 오른 적은 있었으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이러한 기세와 트로피를 안고 유럽으로 돌아온 G2는 골든 로드를 완성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들은 자국 리그를 다시 한번 완벽히 지배했고, 선봉에 선 캡스와 함께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유럽에서 열리는 월드 챔피언십에 상승세까지 등에 업은 상황에서, '캡스' 라스무스 뷘터에게는 전설의 반열에 확실히 자리매김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팀은 한국의 2시드 그리핀과 접전을 펼치며 조 2위로 아쉽게 마감했으나, 여전한 파괴력을 증명하며 강력하게 출발했다. 이어 다음 상대였던
을 3-1로 제압했고, 그다음 상대마저 무너뜨렸다. G2는 이번엔 3-1의 스코어로 SKT를 다시 한번 꺾으며 지난 MSI에서의 승리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소환사의 컵이 홈그라운드인 파리에서 캡스와 G2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유럽의 희망에 불을 지폈던 그는 이제 중국의 펀플러스 피닉스를 상대하게 되었으며, 그들에게 남은 과제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 뒤에 이어진 결과는 전설로 남은 만큼이나 비극적이었다. 엄청난 여정을 보여주었음에도 '캡스' 라스무스 뷘터는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LPL을 상대로 다시 한번 0-3 완패. 꿈을 이루기 직전의 문턱에서 또 한 번 뼈아픈 패배를 당했고, 목표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는 무대 아래에서 지켜보며 만약이라는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방금 자신의 마지막 기회가 빠져나가는 순간을 지켜본 것일까?
추락
기존 로스터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G2는 2020년 다시 한번 도전에 나섰다. 안타깝게도 코로나19 팬데믹이 확산되면서 시즌 전체에 커다란 아쉬움과 의문이 드리우게 되었다. G2는 스프링 스플릿을 거침없이 질주했으나, 글로벌 봉쇄 조치로 인해
2020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이 결국 취소되면서 왕좌를 방어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서머 스플릿은 다소 흔들렸지만, G2는 결국 다시 한번 정상에 올랐다.
G2가 다시 세계 정상에 오를 준비를 마친 것처럼 보였음에도, 2020 월드 챔피언십에서 팀은 이전과 같은 파괴력을 재현해 내지 못했다. 이번에도 조 2위로 그룹 스테이지를 마친 뒤
를 상대로 3-0 완승을 거두었으나, 꿈은 이내 사그라들었다. 2019년의 패배를 설욕하려던 담원은 G2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4강에서 그들을 탈락시키며 캡스의 꿈을 다시 한번 가로막았다.
이후 몇 년간 이어진 흐름은 그가 정상에 얼마나 가까워졌는가가 아니라, 정상이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2021년, 캡스의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월드 챔피언십 진출에 실패한 해였다.
2022년, 다시 대회에 복귀했으나 G2는 녹아웃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2023년, 역시 국제 대회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더 큰 실망만을 남겼다.
한때 월드 챔피언 등극까지 단 한 걸음만을 남겨두었던 선수가, 이제는 대회의 후반 라운드에 진출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2024년, 무언가 불씨가 다시 피어올랐다. MSI에서 G2는
를 3-0으로 완파하며 4위를 기록했고, 수년간의 부진 속에 묻혀 있던 과거의 불꽃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전 세계에 상기시켰다. 2019년의 정점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실질적인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계기였다.
다시 불을 지피다
포기하는 것은 너무 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2025년 대대적인 팀 재정비 속에서, 캡스와 G2는 마침내 오랜 침체기를 깨고 4년 만에 롤드컵 8강 무대에 다시 올랐다.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하게도, 캡스 자신도 변화하고 있었다. 그는 2018년과 2019년에 전 세계를 긴장케 했던 폭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미드라이너의 모습에서 벗어나, 팀의 플레이를 살려주고 동료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전장 중심의 플레이 스타일로 전환해 있었다.
하지만 올해, 캡스는 세상이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음을 증명했다.
퍼스트 스탠드 2026에서 그는 LCK 대표 두 팀을 꺾는 과정에서 6-0을 기록하며 브라질에서 열린 결승에 진출했다. 이어 MSI에서는 3-1 승리를 거두며 T1을 탈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2019년의 영광을 완전히 재현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결과였지만, 무언가 분명 달라져 있었다.
2026 롤드컵을 앞둔 지금, 전설의 전당에 새로 헌액된 그가 유럽과 세계를 향해 또 무엇을 보여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약간의 행운만 따른다면 또 하나의 유럽 성공 신화가 다시금 고개를 들지도 모른다. 한때 끝난 것처럼 보였던 그 꿈은 그저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세월이 흐른 뒤 유럽은 마침내 다시 믿음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